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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03/12  한중동포신문/재한외국인방송
신종폐렴 감염자들이 전하는 이야기

지속되는 격리에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였다. 만약 이번의 긴박한 '전쟁'이 아니였더라면 아마도 인간 사이의 련계가 이토록 긴밀하고 개인 운명과 나라의 힘이 이토록 련관되여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을것이다. 또 평범하던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해 질 것이라는 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CCTV기자가 코로나19 확진자들을 취재했다. 그들 중 일부는 중증에서 경증으로 전환했거나 일부는 완치 퇴원 후 격리 관찰기에 있거나 일부는 온전히 회복하여 집에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번 전염병을 직접 겪은 증인이다. 그들의 경력과 감수는 일반인으로서 이번 중대한 돌발 공공위생사건에 대한 약간의 기록이자 반성이기도 하다.


지푸라기라도 꽉 틀어쥐고 싶은 마음이였다.
림문옥(가명) 52명, 자유직업.

 

만약 이번 전염병이 아니였더라면 우리 일가족 4명은 음력설에 자가운전려행을 떠날 생각이였다. 그러나 전염병이 얼마나 빨리 닥치는지 내가 어찌할 새도 없이 집은 '사분오렬'됐다.
버스 운전기사인 남편은 접촉하는 승객들이 많았다.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84소독액으로 바닥을 닦고 외출했다 들어올 때면 가족들의 옷이랑 신을 모두 문밖에 두었다. 그러나 결코 바이러스를 피하지는 못했다.
1월 28일,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몸에 이상 증세를 느껴 일찍 씻고 잠자리에 누었다.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이튿날 아침에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나와 아들, 딸은 남편을 인츰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구하지 못하고 결국 그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훗날 나와 아이들이 차례로 CT검사를 했다. 나와 딸이 감염되였고 다행히 아들은 무사했다. 2월 2일, 나는 갑자기 숨이 올라오지 않고 몸이 나른해났다. 구조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는 핸드폰을 들 힘조차 없었다. 3일, 병원에 입원한 나는 산소호흡기를 달았다.
방금 입원한 며칠간, 매일마다 생사를 오갔다. 밥 한숟가락, 물 한모금조차 넘기기 어려웠다. 그때에는 아이들 생각뿐이였다. 만약 내가 없어진다면 애들은 어떻게 살아갈것인가?
그때는 정말 살고 싶었다. 한 가닥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였다.
다행히 전국 각지 의료팀들이 무한이 지원을 왔다. 나라가 우리를 살리러 온것이다. 그후 딸은 방창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나의 주치의사는 자기도 코로나19에 감염되였는데 차택격리로 치유되였다고 말했다. 주치의사는 자기의 경력으로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의료요원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살뜰히 보살펴주었을뿐만 아니라 꾸준히 격려해주기까지 했다. "아주머니, 힘내야 합니다. 가족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기분이 다운되여있는 모습을 본 광동의료대 간호사들은 무한말투로 나를 웃기기도 했다.
의사는 나와 악수하려 했고 간호사는 나에게 밥을 떠먹여주려 했다. 그러나 나는 환자다. 특히나 그들에게 전염시킬가 걱정되여 나를 멀리하라고 했다. 그들은 아직 할일이 많고 구해야 하는 환자들도 많지 않은가. 그때는 하루빨리 회복 퇴원하여 병상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다.
입원 8일째 되던 날, 호흡이 차츰 순조로워지고 몸을 움직일수 있게 되였을뿐만 아니라 식욕도 조금 되찾았다. 후날 퇴원할 때 의료요원들이 차를 구해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지금 텔레비전 보도를 볼 때면 그 장면들을 모두 직접 겪어온 나로써 자주 눈물을 흘리곤 한다.
나를 구해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꼭 기억할 것이다. 전염병이 물러간후에도 여전히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체온계 따라 오르내리는 안전감 평소에는 당연지사라고 생각하는것들이 정작 나한테 닥치면 할수 있다고 장담못한다.
리명(가명) 59세, 공무원.

 

나는 어릴때부터 고생해온 사람이라 두려운것이 없었다. 그러나 병증세가 심해져 숨이 가빠질때 머리속이 하옇게 되였고 기분이 매우 저하됐다.
처음에 체온을 잴때 체온계를 아래로 털면 수온이 내려갔다. 그러나 후에는 련속 네번 털어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온몸은 맥이 없고 열이 내리지 않았으며 식욕도 전혀 없었다. 그러나 면역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지 않으면 안된다. 그 며칠은 밥을 1초도 씹기 싫어 통째로 삼키군 했다. 삼키고 토하고, 토하고 또 삼키고 그렇게 반복했다.
병이 퍼지는 속도는 무서웠다. 우리 가족중 형이 먼저 발병했고 4일후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 형은 페암환자였다. 병원에 실려간후 페가 감염된것으로 진단이 나왔다. 일반인이 보기에도 페감염은 페암과 관계되는 듯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형의 후사를 처리하고 나는 발열하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않을 수 없어 병원에 가 검사해보니 신종코로나바이러스 특징을 보였다. 인두면봉채취 검사결과를 기다리는동안은 줄곧 집에서 자가격리하고 있었다. 그 사이 누나와 녀동생도 이어 감염증상을 보였다.
후에 사회구역의 도움으로 입원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때 유서를 어떻게 쓸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는 필과 종이가 없어 머리속에서 한번 또 한번 구상했다.
상황이 좋아진건 체온을 재면서부터다. 그날 아침 체온계를 털어보았더니 의외로 수은기둥이 내려가는것이였다. 약간 격동됐다. 과연 검사후 병소가 흡수되고 있다는걸 알았고, 18일뒤 나는 퇴원했다.
인간은 일을 겪어봐야 평소 당연해보이는것들이 정작 내한테 닥치면 할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입원해있는 동안 하루는 간호사가 저쪽에 앉아 괴로워하는것을 보았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배가 몹시 고프다고 말했다. 화장실에 가는 회수를 줄이기 위해 그들은 줄곧 매우 적은 량만 먹고 있었다.
같은 병동에는 75살 로인이 있었다. 그는 증세가 심한 편이였는데 대소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하루는 침대에 볼일을 보는통에 온 실내에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의료일군들이 인차 들어오더니 금방 치우고 담요를 새것으로 갈아줬다. 감동이였다. 특히 자신이 같은 환경에 있을때 그 감수가 더욱 뚜렸하게 안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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